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생애 == === 즉위 이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Mihai_I_of_Romania_postcard.jpg]] ▲ 어린 시절의 사진. 1차 재위 기간 중으로 추정된다. [[1921년]] [[루마니아 왕국]]의 [[태자|왕세자]] [[카롤 2세]]와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Regina E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좀 후덜덜한데 왕자라는 타이틀 이외에도 조상들의 핏줄을 따라 올라가 보면 친가 쪽으로는 친할머니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는 무려 대영제국의 군주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이자[* 여왕의 차남인 [[알프레트(작센코부르크고타)|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의 장녀.]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외손녀였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자 사실상의 고명딸인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장녀.] 외가 쪽으로 가면 어머니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는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의 장녀로 유럽의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의 친증손녀였다.[*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요르요스 1세]]가 엘레니의 친할아버지다.] 미하이의 외할머니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조피의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가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였다.] 미하이 1세는 외가와 친가 양쪽으로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미하이 1세는 [[영국]]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고 [[엘리자베스 2세]]와도 8촌이며[* 미하이의 외할머니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가 엘리자베스의 친할아버지 [[조지 5세]]의 고종사촌이기 때문. 참고로 미하이 1세를 영어로 부를 때는 Michael I of Romania(루마니아의 마이클 1세)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에겐 그리스계 글뤽스부르크 왕조 기준으로 오촌 조카이며[* 어머니 엘레니의 친사촌. 다만 나이로 따지면 둘이 동갑이다(생일은 필립 공이 4달 정도 빠르다).]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는 8촌이기도[* 미하이의 외할머니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와 필립 공의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이종사촌으로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들이다.] 하다. 그외 친척관계로는 스페인의 왕대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1938)|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왕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외사촌간이며[* 셋째 외삼촌 [[파블로스]]의 자녀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왕 [[페타르 2세]]와는 고종사촌[* 둘째 고모 루마니아의 마리야의 아들.]간이다. 본래 그는 [[태손|왕세손]]이었기 때문에 당시 국왕이었던 할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세자였던 미하이의 아버지 카롤 2세는 자신의 부인 엘레니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고, [[1925년]]에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장례식에 참석하던 중 내연 관계에 있던 [[유대인]] 여성인 [[마그다 루페스쿠]]와 함께 [[이탈리아]]로 도망가 버렸다. 아들의 망나니 같은 짓에 화가 난 페르디난드 1세는 카롤 2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어린 손자 미하이를 올렸다.[* 참고로 카롤 2세는 엘레니 왕비와 만나기 전에 지지 람브리노(1898~1953)라는 여성과 사귀면서 카롤 람브리노(1920~2006)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카롤 람브리노의 장남인 파울필리페(1948년생)는 자신이 가문의 주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2010년에 무려 62세(!!)라는 나이로 아들을 낳았다.(인공수정 혹은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 정설이다. 참고로 파울필리페의 부인은 1949년생. 공식적인 입장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렸다는데...) 하지만 파울필리페는 사생아 혈통인 건 다 집어치우고 [[https://eurohistoryjournal.blogspot.com/2020/12/paul-lambrino-who-is-in-portugal-has.html?m=1|돈세탁, 직권남용 공모 등의 혐의로 2020년에 3년 4개월 형을 선고받고 도피 중]]인 루마니아 공인 범죄자(2022년 가을 프랑스에서 체포, 2023년 현재 송환 재판 진행중으로 일시 석방 상태)인지라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때는 미하이 1세가 딸만 다섯을 둔 지라 파울필리페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듯 하였으나, [[호엔촐레른 가문]]은 [[살리카법]]과 [[귀천상혼]]이 둘 다 적용되기 때문에 그도 계승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미하이 1세가 2011년에 아예 호엔촐레른 가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리카법을 폐지하며 왕실의 이름도 루마니아 왕가로 바꾸면서 말짱 꽝이 되어버렸다.] === 1차 재위와 아버지 카롤 2세의 재위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13c592ff422f6563d8d926e0ed514ad5.jpg|width=300]] ▲ 1928년 1월에 찍은 사진. [[1927년]] [[7월 20일]], 루마니아의 국왕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고 미하이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미하이 1세의 나이는 겨우 6살이었고 당연히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왕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임시 방편으로 3인 [[섭정]] 체제를 구축했다. 섭정을 담당할 세 사람으로는 니콜라에 왕자(페르디난드 1세의 차남, 미하이의 삼촌), 게오르게 부즈두간(대법원장), 미론 크리스테아(루마니아 정교회 주교)가 선정되었다. 미하이는 섭정에 동의하고 루마니아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서약한 후 정식으로 루마니아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3년 후인 [[1930년]]에 아버지 카롤 2세가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이미 1928년 엘레니와 이혼한 상태였던 카롤 2세는 왕위를 욕심내고 당시 루마니아 총리와 비밀리에 모의하여[* 당시 루마니아 정부에서는 왕위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내연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엘레니 공주와 재결합할 것을 요구했다.] 왕위 계승을 약속받았다. 이 상황에서 아직 10살도 안 된 어린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졸지에 미하이는 왕세자로 격하되고[* 이때 왕위 확정상속인에게 주어지는 알바이울리아 대공위를 받았다.] 1930년 6월 8일부터 카롤 2세가 루마니아 국왕이 되었다.[*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의 관계와 흡사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짓이 반대지만. 차라리 [[충렬왕]]과 [[충선왕]] 관계에 더 가깝다.] 그러나 카롤 2세는 왕 자리를 차지하고도 약속했던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내연녀를 만나기 시작했다. 또한 실책도 상당해서 [[삼권분립]] 제도를 없애고 전제군주정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사형]] 제도를 부활시켜 민심을 잃어버렸다. ||[youtube(yiiqdA5K0Y8)]|| || 1939년 아버지 카롤 2세와 함께 폴란드를 방문한 당시의 미하이 1세[* 폴란드 전몰용사 무덤에 헌화를 하고 폴란드군의 사열을 받는 모습이 담겼다.] || 설상가상으로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 간에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고 동년 9월부터 [[폴란드 침공]]에 의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루마니아는 [[독소 불가침조약#s-5|독소 불가침조약의 비밀 합의 조항]]에 의해 영토 일부[* 소련에게는 바사라비아(베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 지방, 그리고 헤르차 지방을 [[소련의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점령|빼앗겼고]], 나치 독일은 루마니아를 압박해 트란실바니아 북동부 지역과 [[다뉴브 강]] 이남의 카드릴라테르 지역을 각각 [[헝가리]](당시 [[헝가리 왕국]])와 [[불가리아]](당시 [[불가리아 왕국]])에 양도하게 강요했다.]를 [[호구(유행어)|호구]]처럼 뜯기면서 카롤 2세는 전국적인 비난 여론과 퇴위 압력에 직면했고, 당시 총리였던 [[이온 안토네스쿠]]가 퇴위를 강권해 [[1940년]]에 결국 퇴위했다. 이후 왕세자인 미하이 1세가 다시 즉위해 2차 재위 기간을 열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18세였다. 안토네스쿠와 [[호리아 시마]]는 그가 재위하자 [[국민군단국가]]를 선포한다. === 2차 재위와 [[친위 쿠데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ignal_16-1941..jpg|width=400]] 이온 안토네스쿠([[망원경]] 바로 앞의 인물)와 미하이 1세(안토네스쿠 바로 왼쪽) 하지만 이미 국가의 실권은 안토네스쿠에게 넘어가 버린 상황이었고 미하이 1세는 2차 재위 때가 되어서도 아무런 힘을 지니지 못했다. 때문에 2차로 즉위한 이후 이온 안토네스쿠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온 안토네스쿠는 이미 [[나치 독일]]의 충실한 종이 되어 있었고 루마니아를 [[추축국]]에 가입시켰으며 [[1941년]] [[6월 22일]] 펼쳐진 [[바르바로사 작전]]에 [[루마니아군]]을 남부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계급)|원수]]) 휘하로 대거 파병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s-7.1|천왕성 작전]]에서 무너져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데...-- 그러나 [[1944년]] 추축국의 패전이 확실해지면서 미하이 1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이 쿠데타는 2차 대전의 종전을 약 6개월 정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로 인해 [[해리 S. 트루먼]] [[미국]] [[역대 미국 대통령|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공로훈장을,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으로부터 소비에트 [[전승훈장]](Орден "Победа")을 수여받았다.] 안토네스쿠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연합국]]에 가담하고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루마니아가 패전국으로 분류되는 것과 [[소련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고, 결국 13만 명에 이르는 루마니아군이 [[굴라크]]에 끌려가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미하이 1세의 정치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 그는 공산 정권이 루마니아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령의 최종 서명을 거부하는 등 노력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루마니아의 왕정은 폐지되었고,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동년 [[12월 30일]] 퇴위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서른도 안 되어 두 번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의지대로 해 본 것이 별로 없었다. === 왕정폐지 이후 === [[파일:external/img1.liveinternet.ru/4520021_king_michael_of_romania_and_princess_anne_of_bourbon-parma.png]] ▲ 결혼식 당시의 모습. 미하이 1세는 퇴위 직전인 [[1947년]] 11월 [[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안 드 부르봉파르마(Anne de Bourbon-Parma)라는 여성을 만났고, [[1948년]] 6월 결혼했다.[* 결혼식 장소는 [[아테네]]였으며 루마니아 공산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리스 왕국]]의 국왕이자, 미하이 1세의 외삼촌(어머니 엘레니 왕대비의 남동생)인 [[파블로스]]가 주선하였다. 다만 미하이 1세의 종교는 정교회였고 안 왕비는 가톨릭이어서,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미하이 1세는 원래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때 가톨릭 교도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계승 서열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미하이 1세의 자녀들은 정교회 신자라서 계승권이 있다고 한다. 계승 순위는 110위권이라 별 의미는 없지만.] 이후 [[이탈리아]], [[영국]]을 돌며 생활하다가 [[스위스]]에 정착했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3세]]가 임시 망명을 떠난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지배하던 루마니아 공산당 정부는 미하이 1세의 [[시민권]]을 [[시민권 박탈|박탈]]해 버렸기에 루마니아로 귀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저 당시 루마니아 꼴을 보면 안 들어가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이후에도 미하이 1세는 자신이 루마니아의 정통성을 지닌 왕임을 계속 주장했으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이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희대의 독재자가 등장하여 루마니아에 폭정을 일삼는다. 차우셰스쿠에게 시달린 루마니아 국민들은 왕가의 복귀를 원하게 되었고 미하이 1세의 국내 평가도 올라갔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Michael_I_of_Romania_by_Emanuel_Stoica.jpg|width=400]] || || [[2007년]]의 모습 ||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차우셰스쿠가 사망한 [[1989년]]이 되어서야 미하이 1세를 비롯한 루마니아 왕가는 루마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쿠레슈티]]에 도착할 당시 미하이 일가를 반기는 사람들의 수가 무려 10만 명이 넘었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온 일리에스쿠는 정권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느껴 다시 입국을 금지했다(...). 이후 [[1997년]] 에밀 콘스탄티네스쿠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하이 1세는 시민권을 회복하고 루마니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chael_I_2014_Romanian_stamp_2.jpg|width=400]] ▲ [[2014년]] 미하이 부부의 모습. 귀국 후 [[부쿠레슈티]]에 위치한 엘리사베타 궁전에 기거하다가 [[2016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으며, 2017년 12월 5일 [[스위스]] 오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https://www.yna.co.kr/view/AKR20171206009100088|#]] 2017년 12월 16일, 부쿠레슈티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영국]]의 [[찰스 3세]] (당시 왕세자), [[룩셈부르크]]의 [[앙리(룩셈부르크)|앙리 대공]],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과 [[실비아 좀멀라트|실비아 왕비]] 부부, [[스페인]]의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1938)|소피아 왕대비]]와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 부부, 옛 [[그리스 왕국]]의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 (마지막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의 부인) 등의 왕족들도 참석하였다. 그 외에는 소피아 왕대비와 콘스탄티노스 2세의 형제(자매)인 이리니 공주, [[알바니아]]의 왕위 요구자 [[레카 2세]],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왕위 요구자(논란 있음)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마리야 여대공]] 등도 있었다. 요약: MADAWIKI에서의 모든 기여는 다른 기여자가 편집, 수정,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자세한 사항은 MADAWIKI:저작권 문서를 보세요).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